[스크랩] [펌]천사의 흰 날개-한분순론 / 박찬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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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흰 날개-한분순론
박찬일(시인)
한분순의 시들은 대조·아이러니들을 생각나게 한다. 시와 시의 관계에 있어서의 대조와 아이러니가 아니라, 한 편의 시 내부에 있어서의 대조와 아이러니이다. 제목부터가 아이러니의 기법을 보이고 있는 '너는 꽃답지 않으나'를 보자(‘너는 꽃답지 않으나’는 ‘너는 꽃답지 않으나 꽃이다’의 준말로 보인다). 5절로 구성되어 있는 '너는 꽃답지 않으나' 각 절은 생명과 죽음의 대조로 일관되어 있다.
생명을 말하면서 죽음을 말하고 있고, 죽음을 말하면서 생명을 말하고 있다. 생명이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결국은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
나는 비늘로 꽉 찬
벽 안에 서 있다
길 잘든 불티끼리
모여 사는 둘레이다
그것은 사랑의 원형(原形),
의지 담긴 화석(化石)의 날개.
2
물집 든 길손의 하늘처럼
불나비가 긋는 나선(螺線)처럼
공터에, 꽃밭에,
출범(出帆)하는 눈들
피로를 모르는 가슴에 늘 볕이 쌓인다.
3
찰나를 잇는 명증(明證)한
음악이 기려울 때
행복을 살 수 없을까,
암표 들고 서성거릴 때
머리에 밤이 들면서
눈에 비친 잔조(殘照)는 자장가다.
4
소리는 바다가 넘치는
행길을 건너서 나풀댄다
빌딩 꼭지점으로부터
소리는 내린다
무성한 숲의 환희를
점철(點綴)하기 위하여.
5
꽃잎과 꽃그늘의
상대적 반사일 뿐
색 바랜 섬광이
안으로 물 살져 흐른다 하여
내밀한 조리개로 좁혀오는
갈채의 시선들.
6
첫새벽 창을 열고
안개 맞아 들인다
바람의 손짓은
온몸의 털끝에 숨 쉰다
그것이 머물 자리는
꼭 우리의 머리맡일까.
7
흙빛 비옥함 속에 서서
노닐다 또 춤추다
오늘은 내일의 언저리,
거닐며 예언하는 것
꼭 빛의 시원(始原)은 묻지 않아도
목숨은, 살거다.
-'너는 꽃답지 않으나 - 시간에 관하여' 전문(유심, 2006. 겨울)
1절에서는 “비늘”과 “화석(化石)”이, 혹은 “불티”와 화석(化石)이 대조되고 있고, 2절에서는
“불나비”와 “볕”이, 혹은 “출범(出帆)하는 눈들”과 볕이, 혹은 “공터”와 “꽃밭”이 대조되고 있다.
‘불나비’와 ‘출범하는 눈들’은 찰나적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둘 다 불에 스러지는 존재들
이다. 3절에서는 “행복”과 “암표”가, 혹은 “밤”과 “잔조(殘照)”가 대조되고 있다. “명증(明證)한/
음악”과 “자장가”도 대조적이다. 행복을 암표로 살 수 있을까.
4절에서는 “바다”와 “행길”이, 혹은 “빌딩”과 “숲”이 대조되고 있다. 숲이 생명을 표상한다면
빌딩은 반생명을 표상하는 것이다. 바다와 행길은 대조를 넘어 데페이즈망을 생각나게 한다. 동일한 공간에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을 설치하는 것이 데페이즈망이다. 달리와 마그리트의 그림들에서
데페이즈망을 말할 수 있다. 데페이즈망과 인접의 관계에 있는 용어들이 미장센, 혹은 그로테스크들이다. 바다와 행길의 병치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5절에서는 “꽃잎”과 “꽃그늘”이 대조적이다. “색 바랜 섬광”은 모순어법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표현이다. 물론 ‘색 바랜’에서 죽음을 얘기할 수 있고 ‘섬광’에서 생명을 얘기할 수 있다.
6절에서는 “안개”와 “바람”의 대조가 심상치 않다. 안개는 정지를 표상하고 바람은 운동을 표상
하기 때문이다. ‘시간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너는 꽃답지 않으나'에서 가장 주목되는
표현은 7절에서 나온다. “오늘은 내일의 언저리”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오늘은 영속적으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이 되면 ‘내일의 언저리’, 혹은 내일의 어제로 전락한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오늘’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오늘, 오늘의 몰락을 의식하는 것이다. 비관주의는 시인들의 가장 비싼 상표이다. 특히 위대한 시인들의 가장 비싼 상표이다.
‘시조의 재생, 혹은 영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래서 메타시라고 할 수 있는 '그러나, 그래도'에도
대조가 있고 아이러니가 있다.
가슴께 덮이는
바랜 그림자에
조락하는 나를
빈다, 재생.
-'그러나, 그래도 - 시조의 재생, 혹은 영생' 부분(문학사상, 2007. 4)
“조락하는 나”와 “재생”의 관계가 대조적이다. ‘조락하는 나를 빈다’고 했다가 갑자기 ‘재생’이
불쑥 튀어나온 형국이다.
시의 부제가 ‘시조의 재생, 혹은 영생’이므로 혹시 ‘조락하는 시조를 빈다’고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조락하는 시조가 재생하기를, 그래서 영생하기를, 빈다고 한 것이다.
“조락하는 나를/ 빈다, 재생”만으로 볼 때 이 구절은 아이러니이다. 조락을 비는 것이 아니라
재생을 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내
신(神) 없는
만찬의 검은 휘장
레몬즙 마시는 동안
연소되는 목숨 한 모금
-'그러나, 그래도 - 시조의 재생, 혹은 영생' 부분
대조와 아이러니는 앞의 ‘재생’으로 끝나는 종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의 초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신(神) 없는/ 만찬”이라니? “만찬의 검은 휘장”이라니? 모두 아이러니이다. 신 없는 만찬은 만찬이 아니라는 것이고, 만찬의 검은 휘장 역시 만찬이 아니라는 ‘정보’를 주는 것이다.
이 시를 ‘시조에 대한 시조’라는 것을 계속 의식한다면 “신(神) 없는/ 만찬”을 신 없는 시(조)단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신을 신명이라고 할 때 신명 없는 시(조)단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간단히 ‘죽은 시(인)의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볼 수 있다.
절창은 조화(弔花)와 조화(造花)를 노래한 '망각의 포옹 - 광화문 네거리'였다.
조화(弔花)인 듯
조화(造花)인 듯
파르르 멀어진다
[…]
눈뜨면
빈손일 뿐
머문 꽃 하나 없다.
두 소절 다 중장들이다. 의도적으로 ‘꽃’을 중장에 설치했다고 볼 수 있다. 한분순 시인은 조화
(弔花)와 조화(造花)에서 인생을 본 듯하다. 조화(弔花)는 잠깐 실재하는 것이고 조화(造花)는 오래 실재하지만 꽃이 아니다. 조화(弔花)에서 잠깐 실재하는 인생을, 조화(造花)에서는 가짜 인생을 본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환유일 수 있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잠깐 실재하는 인생들을, 그러나 진짜가 아닌 가짜로 실재하는 인생들을 본 것이다. 둘째 수 중장에 있는 “눈뜨면/ 빈손”은
조화(弔花)와 인접의 관계에 있고 “머문 꽃 하나 없다”는 조화(造花)와 인접의 관계에 있다.
'눈 부신 날은'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서는 대조가 아닌 ‘유사’를 얘기하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닌
역설을 얘기하고 있다.
속살에 스며서
몸 푸는
고독의 높이
만지며
갈채하며
내 안에 새기고 있을 때
색유릴 끼우고 보면
세상은
눈이 부실까.
-'눈 부신 날은' 부분(시조 21, 2007)
다름 아닌 “고독의 높이”와 “색유리”의 유사이다. 고독의 높이에서 보는 세상은 색유리를 끼고
보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고독의 높이에서 세상은 ‘쉽게’ 보이고 색유리를 끼고 보는 세상 역시
‘쉽게’ 보인다. 세상을 극복한 자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이 더 이상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된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간다는 것은 헤어짐이 아니다'에서 역설을 말할 수 있다.
간다는 것은
꼭
헤어짐이 아니다
가만한 여가마다
회억이 자지러지는 하오
바다쯤
퍼지는 파문
접어두고 살자.
싱그런 가슴끼리
맞대고픈 아쉬움이라면
눈망울은
반드시
흰
손수건이 없어도 좋다
구름이 가면
별이 남아
봄은 겨울 문턱에 서성대는 것.
-'간다는 것은 헤어짐이 아니다' 전문(현대시학, 2006. 8)
이를테면 마음속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헤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를테면 “회억”하고 있다면
헤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쉬움”이 있다면 헤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흰/ 손수건”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헤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구름”은 갔지만 창공에 “별이 남아” 있다면
헤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봄”이 “겨울 문턱에 서성대”고 있다면 헤어진 것이 아니지 않는가.
회억에 대한 절창은 ‘우리 시대 현대 시조 100인선’(한분순 시조집)의 '소녀'에 있다.
어디로부터 오는 꽃내음인가
가멸히 서리는
새벽의 향기(香氣)는……
깊은 난간을 돌아
넘쳐오는
저 회억(回憶)의 꽃보라.
문틈을 넘나드는 소리는
먼 설원(雪原)을 데불고 오네.
-'눈' 전문
“꽃내음”, “새벽의 향기(香氣)”는 “눈”의 은유였다. “회억의 꽃보라” 역시 눈의 은유였다.
시인은 눈을 보며 어느 “설원(雪原)”에서 있었던 일을 회억하고 있다. '소녀'의 많은 시편들이
회억, 혹은 기다림과 관계하고 있다. '회억(回憶)'이라는 시 한 편만 더 인용해보자.
아쉬워 머물게 한
그 사람 길든 모습
몰래 열어보며
눈물로 지내려는데
가끔은
펄펄
튕겨 안기는
살아 숨쉬는 비늘
-'회억(回憶)' 부분
맨 앞에서 인용한 '너는 꽃답지 않으나'에서도 “비늘”은 생명성을 표상하였다. “살아 숨쉬는
비늘”은 생명성을 넘어 관능성을 표상한다. 그 앞의 “펄펄/ 튕겨 안기는”과 결합하면 관능성을
넘어 에로티시즘을 표상한다.
'서성이다 꽃물 들다'에도 눈여겨볼만한 부분이 있다. 시적 화자는 “너”와 함께 서성이던
자리에 와 있는 중이다.
한밤내
종종걸음
숨 가삐 달려온 너
꿈인 듯
달빛인 듯
흰 날개 펼쳐든다
눈가에 어린
그 모습
풀밭 속에 잠든다.
-'서성이다 꽃물 들다' 부분(월간문학, 2006. 12)
“너”가 함께 서성이던 자리에 “숨 가삐 달려”왔다고 하고 있다. 환영(幻影)을 보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꿈”과 “달빛”과 “흰 날개”이다. 꿈은 가상공간으로서의 환영(幻影)과 관계있고, 달빛은
가상공간, 환영(幻影)을 비추는 조명등이다.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흰 날개”이다. 천사의 흰 날개
이다. 벤야민이 설파한 ‘흰 천사’는 역사의 현장에 있는 천사가 아니라, ‘이미 부재한’[이미 지나가
버린] 역사의 현장을 뒤돌아보는 천사이다. 흰 날개의 천사를 시적 화자, 혹은 무대 위의 내레이터라고 할 수 있다. 시적 화자, 혹은 내레이터가 천사의 흰 날개를 달고 이미 부재한 ‘역사의 현장’을 더듬고 있다.
여기에서도 아이러니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꿈인 듯/ 달빛인 듯/ 흰 날개 펼쳐든다”고 했기 때문
이다. ‘∼인 듯’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아이러니를 지나 역설을 말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꿈인 듯한 세계, 달빛인 듯한 세계에서 진짜 ‘흰 날개’를 본 것이다. 혹은 흰 날개를
펼쳐 든 자기 자신을 본 것이다. 천사의 이미지는 시집 '소녀'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세상은 꽃수렁, 그래서
흐느끼는데
피맺힌 손톱 깨물며
파닥이는 이 날개짓
층계를
밟고 오르듯
숲은 구비로 끝없네.
-'비가(悲歌)' 부분
“세상은 꽃수렁”인데 “흐느끼는” 것은, “피맺힌 손톱 깨”무는 것은, 꽃수렁을 함께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사의) “파닥이는 […] 날개짓”이라는 표현이다. 시적 화자는 물론(천사
의) 파닥이는 날개짓으로서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종장에서 “숲은 구비로 끝없네”라고 했기 때문이다. ‘숲은 구비로 끝없네’라고 한 것은 도달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박찬일 약력: 춘천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에 '무거움' '갈릴레오' 등을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
시집으로 '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 '나비를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모자나무' 등이
있음. 박인환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등 수상.
* 위의 글은 계간 '열린시학' 2007년 겨울호(제12권 4호 통권 45호)에 실린 평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