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수익 - <그리운 악마> 외 7편
<그리운 악마>
이수익(1942년생)
숨겨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 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여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廢家>
이수익
빈 산막山幕엔
능구렁이처럼 무겁게 살찐 고요가
땅바닥에 배를 깔고 숨을 몰아쉬고 있다.
흙담이 무너져 내려 썩고, 나무기둥이며 문살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썩고 썩어
향기로운 부식의 냄새를 피워 올리는,
이 버려진 산막山幕 하나가 고스란히 해묵은 포도주처럼
맑은 달빛과 바람소리와 이슬을 먹고 발효하는
심산深山의 특산품인 것을.
신神이 가끔 그 속을 들여다보신다.
<우울한 샹송>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 있는
悲哀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衣裳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愛情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말>
이수익
말이 죽었다. 간밤에
검고 슬픈 두 눈을 감아 버리고
노동의 뼈를 쓰러뜨리고
들리지 않는 엠마누엘의 성가(聖歌) 곁으로
조용히 그의 생애를
운반해 갔다.
오늘 아침에는 비가 내린다.
그를 덮는 아마포(亞麻布) 위에
하늘에서 슬픈 전별(餞別)이.
<봄에 앓는 病>
이수익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 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
늦게서야 병이 오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현신하여
지금
나의 사방에 가득했는데
아아, 이 즐거운 시절
나는 누워서
지난 겨울의 아픔을 병으로 앓고 있노라.
<가을 序詩>
이수익
맑은 피의 소모(消耗)가 아름다운
이 가을에,
나는 물이 되고 싶었읍니다.
푸른 풀꽃 어지러워 쓰러졌던 봄과
사련(邪戀)으로 자욱했던 그 여름의 숲과 바다를
지나
지금은 살아 있는 목숨마다
제 하나의 신비로 가슴 두근거리는 때.
이 깨어나는 물상(物象)의 핏줄 속으로
나는 한없이 설레이며
스며들고 싶습니다.
회복기의 밝은 병상에 비쳐드는
한 자락 햇살처럼
아, 단모음의 갈증으로 흔들리는 영혼 위에
맺힌 이슬처럼.
<안개꽃>
이수익
불면 꺼질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히 서려 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련(初戀)의
꽃.
무데기로
무데기로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형상이 되어
설레는 느낌이 되어 다가오는 그것은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
<호롱>
이수익
골동품 가게에서
옛날을 생각하며 호롱을 하나 샀다,
어느 초가의 안방이나 사랑채
한 모서리에
밤마다 소중히 모셔졌을 이 빛의 도구를
국수 한 그릇 값으로 나는 가져왔다.
지금은 쓸모없는 퇴기(退妓)처럼 버려진
골동 중에서도
대접이 서자(庶子) 같은
이 고전의 기물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마음 한가운데 보드라운
희열의 물살이 이는 것은,
아, 누군가
가물대는 이 호롱의 불빛을 이마에 쓰고
터진 식구들의 옷가지를 땀땀이 기웠을
그런 아낙과
이 호롱 아래서 조용히 책장 넘기며
불빛 따라 희미한 새벽의 여명 속으로 건너갔을
한 꿈의 소년과
이 호롱의 불빛으로 잠 못 이루는 해수(咳嗽)의 밤을
혼령처럼 앉아 지샜을 그런 노인과
이 호롱 아래서 잠든 아이들 얼굴을 지켜보며
나즉이 두런대던 근심어린 대화의
한 부부와
이 호롱의 불빛에 부끄럼과 갈증을 느끼며
칠흑 어둠 속으로 자지러들던 초야의
한 신혼과……
아, 어쩌면 그들은 내 부모였고
할머니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모
아니면 내 이웃들의 선친이었을 그런 가까운 사람들의
그립고 눈물겹고 간절한 사연들을
호롱,
이 침묵의 유물은
가만히 뿜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