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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자 시인 작품

햇살 한 줌 2008. 2. 17. 22:56

새해 새아침에 / 송길자

 

 

백지 한 장 앞에 놓고 새해 아침 바라보면

고즈넉 한 장 백지는 눈부신 설원인데

그 누가 발자국 찍으며 이 정적을 끌고 가리

 

가만히 선을 그으면 길이 되어 나타나고

포물선 던져보면 산이 되어 둘러서고

한 줄기 오르는 연기 인기척도 들려오리

 

산 위엔 동그라미 민들레꽃 같은 해님

점점이 먹물 떨구면 뛰어노는 아기 사슴들

새 천년 동트는 마을 샘물 잣는 까치 소리  

 

 

아지랑이1 / 송길자

 

햇빛과

바람결로

무늬 놓는 나뭇잎들

 

잠이 든

언덕을 깨워

춤을 추는 아지랑이

 

또 한 철

살아 눈 뜨는

노래여 여울이여

 

 

아지랑이 2 / 송길자

 

새움이

돋는 소리

아지랑이 타는 소리

 

어디선가 낮닭 소리

꽃물이 터지는 소리

 

천지가

너울을 썼네

금빛 물결 밀려오네

 

 

 

초봄 / 송길자

 

겨우내 헝클어진 산수유 울타리에

신행 온 햇살들이 입김들을 나누는 날

북성산 냉이 돌나물 봄을 살짝 엿본다

 

개나리 진달래꽃 신접 난 담장 아래

보랏빛 목련가지에 맑은 바람 걸어주고

작약순 흙을 비집고 빨간 촉수 내민다 

 

 

 

꽃아 꽃아, 모란꽃아 / 송길자

 

한 이레

들명나명

눈길 속에 머물던 너

 

엷어진

하루해를

네 그늘에 눕고 싶다

 

허술한

우리 집 뜨락

뚝뚝 지는 모란꽃아

 

 

 

지금쯤 아카시아 꽃은 / 송길자

 

새소리

여울물보다

어여쁜 그 뒷동산

 

지금쯤

아카시아꽃

피었을까 흩어졌을까

 

접어도

접히지 않고

펼친 생각 한 자락

 

 

 

장마 / 송길자

 

씻어도 가시지 않네

후터분한 7월 입내

 

어디서 일년 내내 기척 없이 숨었다가

황토빛 붉은 얼굴 들이밀고 또  왔는지

온 산야 온 집구석에 땀내를 짓이겨 놓고

지척지척 다가 앉아 궤변만 늘어놓더니

천성은 못 감춰서  본색을 드러내는 데는

빚 갚아라 빚갚아라 저승서 진 빚 다 갚아라!

내지르는 고성대갈 청둥번개 두 눈 휘번뜩

타고난 그 광기와 몸에 밴 그 바람기는

선대적 내력인지 후대적 물림인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제풀에 지쳐 나갈 때까진

 

 

 

오동꽃 삼십리길 / 송길자

 

덧없이 쌓인 나날 심연 같은 적막 위에

상주서 화령까지 오동꽃 삼십리길

보랏빛 화사한 정을 냇물처럼 흘렸었지

 

햇빛을 입에 물고 따라오던 해오라기

쏟아지던 매미울음 산과 들 더 푸르던

그 때 그 물들인 하늘 이 가을에 또 도져

 

흐트러진 일상을 간추려 모아놓고

살아온 갈피마다 고운 눈길 실었느니

기약한 그날이 오면 다시 만나보겠네

 

 

 

 가을 소곡 2 / 송길자

 

가을이 우산을 받고 긴 둑을 걸어갑니다

명수대 굽이돌며 강물이 흘러가듯

당신은 슬픈 물음표 나도 따라갑니다

 

가다간 지친 나무에 안식 하늘 걸어두고

까맣게 잦아든 목숨 흔들어서 깨워도 주는

당신은 밀감빛 등불 그윽한 별입니다

 

때로는 손 닿을 듯 지척으로 다가와 서고

또 때론 구만리 장천 가물가물 흘러가는

당신은 빗소립니다 하얀 밤을 두드리는....

 

 

어느 가을날 / 송길자

 

고요도

여위는가,

그림자 엷어진다

 

경회루

추녀 끝에

걸려 있는 한 잎 구름

 

바람만

시시로 와서

노을빛을 흔드네

 

 

 

 낙과 (落果) / 송길자

 

모두가 바람이었네

말아올린 회오리였네

 

한 떨기

진한 사랑도

낙과로만 보냈거니

 

그 누가

이 아픈 무게를

꿈이라고 했던가

 

 

 

가을 풍경 / 송길자

 

 

화가도 그리지 못할

풀벌레 노랫소리

 

농사아비 돌아가고 되돌려준 가을 들판은

황혼길에 모여 앉은 쓸쓸한 동창회 같네

베짱이 귀뚜라미 방울벌레 여치 매미

쓰르라미 찌르레기 철써기풀 종다리

탄주인지 연주인지 독주인지 합주인지

타고난 목청으로 시든 풀밭 흔드는데

그도 저도 못 타고난 빈 들녘 허수아비

 

다 거둔 들판에

남아 혼자 도는 바람개비

 

 

  

가을비 / 송길자

 

 

자물쇠

잠겨 있어도

환히 열린 문이 있네

 

세월은

자취 없어도

옛 생각은 밟히는데

 

빈 뜨락

내리는 가을비

진양조로 추적이네

 

 

 

가을을 보내며 / 송길자

 

 

드리워

무거운 세월

가라앉은 조그마한 추錘

 

사랑 이별 그리움은

강물에 띄웠거니

 

사는 일

눈발이 되어

허공중에 나부끼네

 

  

 

나목裸木 / 송길자

 

해와 달

별빛도 무거워

가지마다 털어냈나

 

지고 온

가을도 보내고

벼랑 끝에 지켜 선 채

 

빈 하늘

젖은 꿈 하나로

봄을 불러 서 있는가

 

 

  

거미의 노래 / 송길자

 

오늘은 허공을 그려

하늘 이야기 받아내리고

 

내일은 실을 뽑아

땅 이야기 감아 올려라

 

누군들 하늘 땅 이야기

미리부터 안다던가

 

어쩌면 하루살이

아니면 잠자리 날개

 

빈 하늘 새털구름

무지개도 와서 걸리리

 

거미야 하늘을 짜거라

꿈도 짜서 늘리거라

 

 

 

작은 종 / 송길자

 

애당초 내 사랑은

울 수조차 없는 하늘

 

아니지

매맞고 일어서야

둥그렇게 우는 천지

 

눈물이

되돌아와서

감겨드는 내 사랑

 

산이 높아 못 넘으리

들이 넓어 못 건너리

 

작은 몸

하나의 무게로

그 하나의 설움으로

 

한 발 더

네게 다가가

나는 울며 흔들리리

 

 

 

 비비새 우는 날에 / 송길자

 

노을빛 이마에 받으며

석간을 펼쳐들면

 

허공에 깃 다듬는

비비새 울음소리

 

인간사 모른다는 듯 잔가지만 고른다

 

별빛을 물고 와서

하늘 소식 이어주고

 

이른 봄 가지마다

꽃망울을 달아주며

 

한 계절 건너는 냇물 징검다리 놓는다

 

 

 

비 / 송길자

 

유리창을

때리는 것이

눈물인가 빗방울인가

 

아니면

징징 우니며

매달리는 벌 떼인가

 

닦아도

이내嵐에 감기네

내 한 생 푸른 사슬

 

 

 

은행에서 / 송길자

 

차 한 잔

뽑아들고

기다리는 은행 창구

 

그리움 입금하고

아쉬움만 찾아든다

 

복리로

늘어난 시름

서걱이는 갈대소리

 

 

  

낮잠 / 송길자

 

 

자꾸만

자무라지는

베겟머리 긴 자맥질

 

꽃 피고

꽃 지던 날의

나부끼는 설레임

 

내 꿈은

잠겼다 뜨는

한낮의 작은 부표

 

 

 

사슴의 노래 / 송길자

 

 

길길이 눈이 쌓여

길을 찾지 못하겠네

 

온갖 포식동물들이 숨어사는 야성의 숲

명리에 귀 세우고 공리에 이빨 세워

언제 불쑥 날 덮칠까 어금니를 드러낼까

자국마다 함정이요 걸음마다 올가민데

 

그 숲속 기척을 몰라

냇물 가를 서성이네

 

 

 

불면의 밤 / 송길자

 

욕망을

불지르고

버텨온 자존도 헐고

 

한 가닥 양심 가책

촛불처럼 꺼진 날들

 

차라리

바다 깊숙이

수장되고 싶어라.

 

 

 

그대 홀로 떠난 자리 / 송길자

 

그대 홀로 떠난 자리 두고 간 이승 열쇠

눈물로 베푼 걸까 한숨으로 때린 걸까

나날이 열리는 문마다 불을 밝힌 설움입니다

 

하루 해 열고 닫는 새소리는 여울지고

피는 꽃 바라보는 내 눈엔 진눈깨비

이승길 두고 간 화두 풀고 감다 지샙니다

 

 

 

 초야 / 송길자

 

금빛

부신 햇살

보조개에 받아들고

 

마주한 그대 앞에

붉히던 눈언저리

 

수줍어

투망에 걸린

스무 살의 첫날밤

 

 

 

다 부르지 못한 노래 / 송길자

 

내가 나를 지우고 싶다

무력만을 즐겨온 나

 

이성을 갉아먹고도

부화 못한 너로 하여

 

그 숲속

헤매온 낮과 밤

허울도 벗기고 싶다

 

부질없이 쌓은 탑

그 오만도 다 지우고

 

죽어서도 피어나는

가슴 속에 물린 씨앗

 

지니고

떠난 어머니의

푸른 향낭이고 싶다

 

 
남산 위에서 / 송길자

 

삼각산

병풍을 치고

장안은 방안 같다

 

길은 정맥처럼

사방으로 뻗쳐 있고

 

자욱한

매연의 강물

눈에 가득 흐른다

 

 

 

 

국수 / 송길자

 

 

희멀건 육수 속에 타래지어 앉은 사리

풀리지 않는 사연 가닥가닥 잠겨 있다

다 먹고 비운대 해도 허기만 질 국수사발

 

풀어진 국수가닥 조심스레 건진다만

건져도 배고픈 건 너나 나나 매한가지

빈 사발 하늘만 잠겨 아쉬움만 남는 것

 

이승길 비춰보면 저승길도 보이는데

한 그릇 국수 위에 고명으로 얹는 시정詩情

곁들여 마시는 모주 그 눈물맛 어이리

 

 

 

그네 / 송길자

 

 

눈물도 걸어두면

금동앗줄이 되는 거

 

밀어봐라 북새바람 불어와라 마파람아

휘늘어진 줄을 잡고 늠연히 발 구르면

그 높던 나날의 산하도 두 발 아래 출렁이고

밀었다 당겨보고 당겼다가 밀어보고

오르락 또 내리락 사는 일도 그렇거니

눈물도 오동지 삭풍朔風에 휘날리는 눈발 같고

 

언제나 일진一塵의 바람

속절없는 보람이네

 

 

 

추운 불 / 송길자

 

 

불이 춥네

때 없이 켜지는 불이 춥네

 

오뉴월 염천에도 추워 떨게 하는 불꽃

싸늘한 얼음장으로도 꺼지지 않는 불꽃

끌수록 기름 부은 듯 활활 타는 나의 불꽃

재도 없는 빈자리에 꺼져 버린 불꽃처럼

제 혓바닥 제가 삼킨 뜨거운 불꽃처럼

그불꽃 숯이 되어 입을 다문 불꽃처럼

 

매달려 춥기만 하네

펄럭이는 깃발처럼 

 

 

 

노마(路馬) / 송길자

 

 

안개밭 언덕길을 절뚝이며 걸어간다

무엇이 보였던가 무엇이 들렸던가

가다가 껌벅이는 눈 쫑긋쫑긋 귀도 세우고

 

고삐가 없는 데도 끌려가는 이승의 길

내뿜는 하얀 입김 두 뺨을 적시는 안개

한 생애 안개를 울고 안개 속에 산도 울고

 

보이지도 않는 핏줄 밟고 가는 긴 여정

그 핏줄 강에 가 닿는가, 바다에 가 닿는 건가

멀고 먼 이역異域의 피안彼岸 헐떡이며 가고 있다

 

 

 

바람 부는 날에 1 / 송길자

 

아서라 천년 기도로도

녹일 수 없는 빙산인 것을

 

바람아 바람아 칼날 같은 너 바람아

시퍼런 칼 높이 빼들고 쉴새없이 몰아쳐 온들

저기 저 산의 무게를 어디로 옮길 것이며

여기 이 원죄의 값은 무엇으로 다 갚을 거냐

 

낭자히 흐르는 피가

긴 강물을 물들인다

 

 

 

바람 부는 날에 2 / 송길자

 

 

누가 치는 팽이이기에

온 세상이 이리 도나

 

지구는 제 풀에 돌고 태양은 제멋에 돌고

달은 해의 꼬릴 잡고 물은 불의 꼬릴 물고

정신은 물질을 쥐고 슬픔 기쁨 서로 엉켜

돌고 도는 맴돌이에 갈피 모를 소용돌이

만유의 그 중심 잡느라 하늘도 혼자 빙빙 돌고

방향 모를 삶의 기로에 덩달아서 나도 도네

 

오늘도 회오리 바람

핑핑 도네 긴 상모 

 

 

 

싸리산 가는 길 - 어머님 가시던 날에 / 송길자

 

 

건너가네 건너가네

황량한 이승 언덕

 

살아 흐른 시름의 강

배도 돛도 노도 없이

 

빈 날에 눈발 날리는 하늘강을 저어가네

 

여읜 봄 새벽 기슭에

바랜 목숨 뉘어놓고

 

기워 입은 80평생

인연들도 개켜놓고

 

피 달인 생애도 재우고 푸른 연기로 떠나가네

 

큰 구비 작은 구비

숨이 차던 이승 언덕

그을린 목메임도 옷깃 여며 잠재우고

웃는 듯 주무시는 듯 마실가듯 비우셨네

 

물끄레 바라보신

세상은 그대로 난시亂時

 

아파트 옥상 바람개비에

노여움도 돌려가며

 

얼마나 헤이셨을까 나이테로 두른 고독

 

창밖에 구름처럼

모두 다 스쳐가면

 

불타는 낙일이나 눈으로 주으셨을

 

보늬로 쌓인 그 적막

몇 겹이나 벗었을까

 

수심으로 수를 놓아

짜고 가신 그 피륙은

 

싸리산 가는 길의 강물보다 길었으리

 

그 강물 하늘에 닿아

은하수도 되었으리 

 

 

 

 頌歌 - 草丁先生 八旬 기념에 부쳐 / 송길자

 

 

한 그루 거목으로 나이테를 감고 서서

눈보라 아랑곳없이 무성한 가지를 뻗어

머리에 고인 하늘도 종소리도 울린다.

 

큰 나무 아래 서면 흔들리는 쇠북소리

산 넘고 강을 건너 울려오는 마을까지

깊은 산 깊은 골 돌아서 까마득히 스민다

 

길 아닌 길 방황하며 푸른 꿈 갈[耕]다가도

제 자리 떨어지는 우람한 범종 소리

총총히 잎잎에 내려 별빛으로 빛난다

 

남한산성 행궁터 느티나무 숲에 가면

훨훨 시공을 넘어 엮어 내린 사연 있을 듯

밟히는 그날의 이야기 듣는 이는 듣는다

 

 

초정草丁의 푸른 숨결 - 草丁 스승님을 기리며 / 송길자

 

하루도 떠나지 않는 깊은 잠 외로움과

세상살이 맥박을 짚어가던 말씀이

수묵화 자 산빛처럼 가슴에 와 젖습니다

 

스승님이 떠나시다니 이승 접고 가시다니

솔잎처럼 청청하고 참대처럼 곧으시더니

다정한 비둘기처럼 부인따라 가셨습니까

 

한 모금 푸른 이내 깊은 숨결 그려지고

한 가치 권련으로 시 한 수 풀려나던

스승님 뿜어낸 연기 옷깃에나 묻히리까

 

남해 통영 물빛보다 더 푸른 임의 숨결

하늘에 벌써 닿아 청람빛  눈부신 하늘

하느님 울울한 심기도 시심으로 재우소서

 

 

 

 

남한강 일몰 / 송길자

 

 

떠나올 땐 몰랐던 설움

이제 와서 생각하면

 

조금씩 익어가는 가을열매 같은 것

 

제 울음 건지고 싶은가

추스르는 노을 한 채

 

 

  

고향을 그리며 / 송길자

 

가만히 눈 감으면

상처처럼 도져오는

 

남한강 푸른 가락 초록빛 너울이 진다

긴 세월 강머리에는 신륵사가 나와 앉고

 

강물에 띄워 보낸 봄 한철 꿈이던가

해맑은 풍경소리 뗏목들이 싣고 가고

풀피리 한 가락에도 돌아눕던 왕릉이여

 

파사성 높은 숲도

영월루 밝은 달도

 

추억은 곱기만 한데 시름은 업은 아기

이 봄도 여주 종달이 풀빛 울음 우는구나

 

 

 

신문을 보며 / 송길자

 

 

날마다 어지러운 무질서의 극치를 본다

듣도 보도 못한 설화 넘쳐나는 지면의 바다

짝지은 비리 부패가 괭이 갈매기처럼 난다

 

눈감고 바라보면 열려오는 푸른 바다

가까이 다가서면 핏빛 상잔의 소용돌이

한 목청 안개 속에서 잠을 쫓는 고동소리

 

치지도 않는 팽이 �을 잃고 도는 세상

가려도 귀막아도 흥청대는 저 굿판을

눈 들어 하늘을 보자 고개 들어 산 빛을 보자

 

 

 

손 / 송길자

 

구름을 붓으로 쥐고 덧칠하는 손이 하나

청람빛 하늘에다 붉은 물감 다시 풀어

번지는 노을을 뭉개고 입 가리는 손이 하나

 

꽃에는 꽃향기가 풀에는 풀 향기가

동남풍 몰아치면 뒤집어질 흙냄새가

어느 날 마른 번개로 찢고 갈 손이 하나

 

 

 

오! 필승 코리아 ! / 송길자

 

통한을 밑천 삼아 엮어 내린 우리 역사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물도 끓어올라

백두여 한라산이야 드높아라 필승 코리아!

 

어쩌면 세계사가 그리 넓지 않았나 봐

어쩌면 인류사도 그리 높지 않았나 봐

단발의 축구공 하나로 골문을 열었느니

 

가파른 오쳔년사 축구공이 뚫었거니

기나 긴  고난의 파도 그 함성도 넘었거니

겨레여 찬란한 깃발 또 창공에 일으키자!

 

 

 

판문점 까치 / 송길자

 

 

팽팽히 쳐논 가시줄

퉁겨보며 점검한다

 

얼어버린 감시의 눈

서로 달래고 녹이다가

 

끊어진 한 금을 울어

볼 비비는 사랑새여

 

철조망에 걸려 있는

안부도 쪼아가며

 

통일의 둥우리를

부리로 짜고 얽는

 

내일의 풋풋한 아침

노래하는 바람새여

 

 

 

경복궁에서 / 송길자

 

 

이 가을 고궁의 뜨락 고요 속에 내가 서면

오백년 엮어 내린 물소리 바람소리

어디라 애달픈 사연 낮 귀뚜리 우닙니다

 

서리 찬 매운 향기

씻어 펼친 바람 한 끝

 

청자 고운 하늘

한 자락을 물들이는데

 

경회루 못물에 잠겨

수채화로 번집니다

 

향원정 돌아들면 새소리도 시리구나

까치가 물고 온 열매 부리 끝에 농익은 맛

난간을 떠받친 돌기둥 푸른 한을 새깁니다

 

 

 

서귀포에서 / 송길자

 

 

그리움 눈발이 되어 해종일 나부낀다

파도에 앉는 눈발 섬마을에 지는 눈발

동백꽃 눈 속에 무너져 섬 하나가 떠오른다

 

잔물결 나울지고 물새 울음 잠기는 섬

차오르는 물굽이에 부서지는 세월의 섬

갈매기 죽지에 실려 떴다 잠긴 천애의 섬

 

출항을 서루르는 고깃배 기적 소리

동트는 새벽하늘 걷어내는 서귀포항

물이랑 일어선 바다 자맥질만 하는 섬

 

 

 

 대관령에 올라 / 송길자

 

 

하늘 아래 대관령은 아스라한 굽이굽이

살아온 내 길인가 갈수록 숨이 차다

돌아든 험준한 계곡 벗지 못한 짐이네

 

한 시름 숨 돌리고 분수령에 올라서면

시위처럼 당겨지는 먼 동해 푸른 숨결

한 생에 드세던 일도 저리 잠들 줄이야

 

 

 

시인이 사는 풍경 / 송길자

 

 

본향에 찾아 들어 노래 심는 자작나무

채마밭 일구듯이 날과 달을 가꿔가며

꽃구름 피어오르듯 시정을 꽃 피우네

 

한 세월 등에 업고 남한강을 띠 두르고

문바위 흐르는 물 골짜기를 씻어내려

한 가득 기름진 들판 사랑으로 안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