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공부하기

왼 손가락으로 쓰는 편지 /고정희

햇살 한 줌 2008. 3. 5. 13:43

왼손가락으로 쓰는 편지

고정희


무정한 이여,

하고 소리쳐 부르면

앞산이 그 소리 삼켜 버리고

정말 무정한 이여,

하고 소리쳐 부르면

뒷산이
그 소리 삼켜버리고

다시 무정한 이여,

하고 먼 산 향하여 토악질하면

안산에 주룩비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일시에 안산을 적시는 주룩비,

과천을 적시고

군포를 적시고 포일리를 적시는 주룩비,

끝내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주룩비,

내 생의 목마름 조금 적실 수도 있으련만,

아아 주룩비,

잠들지 못하는 것들 품어

함께 노래할 수도 있으련만,

외로움의 우산 밖으로 밖으로

미끄러져내려
빠르게 떠나가는 물줄기는

꼭 당신 뒷모습 같아

나는
서러움에 목이 메이고

어디선가 소쩍새 우는 소리로
사랑의 축대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