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향
회향
사람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미덕이란
대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남을 도와주는 행위이다.
우리의 전래 민담에서,
추수가 끝난 가을밤에 서로의 볏가리를 몰래 오가며
자기의 볏단을 상대방의 볏가리에 얹어 주길 반복하다가,
구름 사이로 터져 나온 달빛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고서야
자기의 볏가리가 줄어들지 않은 이유를 알게되면서
더없이
훈훈한 형제애로 얼싸안은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감동을 자아낸다.
이 이야기에서 두 형제의 행위는 당연히 미덕으로 칭송될 만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형제간이 아니라 혈연 관계가 없는 이웃이었다면,
그 행위는 지극한 미덕의 표본으로 회자하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미덕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음으로써
자신에게 도래할 유형적이거나 무형적인 혜택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길 진정으로 바란다면, 이 정신은 그야말로 미덕의 극치라고
다른 미덕과 구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미덕의 극치'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 정신을 보살이
지녀야 할 당연한 자세라고 강조한다.
그 보살에게는 '미덕의 극치'보다 더한 어떠한 칭송도 무의미하다.
그 과보가 자신에게 되돌아오길 전혀 바라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특별한 수사(修辭)로써 치장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만,
'숭고한 정신'이라는 표현 정도로는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그와 같은 숭고한 정신을 특히 대승 불교에서는 '회향'(廻向)이라고 한다.
여기서 회향이란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는 어떤 선행의 과보를
다른 사람에게 가도록 돌리는 것이다.
아울러 또 한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불교에서의 수행이나 도덕적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있기 때문에, 자신이 실천한 모든 노력의 결과가
그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회향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실천한 선행을 자기의 깨달음
이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회향의 정신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처음 예배 공경함으로부터 중생의 뜻을 그대로 따라 받아들이기까지,
그로 인한 공덕을 온 세상에 있는 일체 중생에게 돌려보내,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편안하고 즐겁고 병고가 없게 합니다.
나쁜 짓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착한 일은 모두 이루어지며,
온갖 나쁜 길의 문은 닫아버리고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활짝 열어 보입니다.
중생들이 쌓아 온 나쁜 업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무거운 고통의
여러 가지 과부를 내가 대신 받으며, 그 중생들이 모두 해탈을 얻고
마침내는 더없이 훌륭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힘씁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회향합니다.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할지라도 나의 회향은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간순간 계속하여 끊임없어도 몸과 말과 생각에는 조금도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회향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자기의 선행을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돌리는 '보리 회향'과
남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돌리는 '중생 회향'이다.
보리 회향은 선행의 공덕이 실생활의 좋은 결과로 나타나기보다도
깨달음을 성취하는 결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다.
한편 중생 회향은 자신이 실천한 선행의 공덕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돌리는 것,
즉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결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보리 회향은 불교의 수행과 실천에서 궁극이긴 하지만,
중생 회향은 보리 회향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리 회향보다
더욱 귀중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면 '중생을 위해 선행을 닦아 보리
즉 깨달음에 회향하는 것은 비가 대해로 들어가는 것과 같고,
자신을 위해 해탈을 구하는 것은 비가 육지로 내려가 이내
다시 말라 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한다.
회향을 3종으로 분류할 때는 위의 두 가지에 '실제(實際) 회향'을 추가하는데,
이는 불교 정신에 입각하여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진실한 회향이라고 이해된다.
그 의미는 '무상한 것을 멀리하고 진실한 이 법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선행을 평등하고 불변하는 진리 자체로 돌리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쉽게 말하면 아무런 집착이 없이 불도를 실천하는 정신을 회향과
접목시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진실한 회향은 회향하는 자도 회향하는 법도 회향하는 곳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할 때,
실제 회향이란 바로 이 진실한 회향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집착이 있다면 그것은 뭔가의 결과에 집착하는 '취상(取相) 회향' 이라고 불린다.
대지도론에서는 ''만약 집착한 뭔가의 결과를 얻음이 있어 회향한다면,
큰 이익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회향은 독을 섞기 때문이다.
좋은 음식에 독을 섞는 것과 같다.''라고 설명하면서 진실한 회향을 강조한다.
불교 신자들이 보통 선호하고 있는 것은 이상과 같은 3종의 회향보다는
중국의 정토 신앙에서 정립된 2종의 회향이기 쉽다.
당나라 시대의 담란(曇鸞) 스님이 「왕생론주」(往生論註)에서 정립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왕상(往相) 회향'과 '환상(還相) 회향' 이다.
왕상 회향은 자신의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돌려, 함께 아미타 이래의 안락
정토에 태어나길 기원하는 것이고, 환상 회향은 정토에 태어난 끝에 다시
생사의 세계로 되돌아와서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함께 불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환상 회향은 일단 정토에 왕생한 사람이 자신의 안락을 포기하고
다시 이 세상으로 되돌아와서 다른 사람을 교화한다는 대승 특유의 보살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일찍이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이미 선의 이상향을 인식한 자가
다음 단계에 현실 세계에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다.
이 같은 사고와만 견주어 본다 하더라도 회향의 정신은 인류가 꿈꾸는
진정한 이상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불가결한 미덕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