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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심보선
햇살 한 줌
2008. 8. 25. 20:44
오늘 나는
심보선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염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밖의 이런저런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無)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年度)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창작과 비평2008년 봄호 발표)
약력: 1970년 서울 출생
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슬픔이 없는 십오초" 2008년
2008년 미당 문학상 후보작 <오늘 나는>외 13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