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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 한 장 붙여서 /천양희
햇살 한 줌
2008. 12. 5. 22:48
우표 한 장 붙여서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 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어둠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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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