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강용 시인의 좋은시조 리뷰>나목, 초설 / 이옥진
나목, 초설
이 옥 진
마지막 한 잎 떨구고 망연히 서 있었네
비우고 다 버리니 바람도 무섭지 않네
온 가슴 뒤흔들던 바람 알고 보니 내 편이네
먹이와 배설에 묶여 쉼 없이 달려온 몸
눈바람 흠뻑 쐬며 독소를 뽑아내고
벌레집 습한 상처들 뽀송뽀송 말리려네
푸르른 하늘 아래 눈 덮인 벌판 위에
빛 너울 살짝 걸치고 한 가닥 부끄럼 없이
태초의 한 점 순수로 나 그렇게 있으려네.
- 『나래시조.81』2007.봄호 -
- 깊은 사색, 나목에 접붙인 삶의 철학
회지를 읽는 시간은 즐겁다.
시인과 고생한 편집진의 땀 냄새를 곳곳에서 맡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래 81호!
그 가운데서 ‘있잖아’(민병찬), ‘숨바꼭질’(박희정), ‘아버지의 강2’(윤종남), ‘나목, 초설’(이옥진), ‘먼 날의 무늬’(정화섭)를 주의깊게 읽었다.
그 가운데 이옥진의 ‘나목, 초설’을 뽑아 보았다.
박희정은 ‘숨바꼭질’에서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한 뒤에 얻은 삶의 철학을
작품에다 얹어 놓았고,
이 작품은 대상이 된 나목을 바라보며 깊이 사색하는 가운데,
거기에 우리 삶의 길을 정교하게 접목시키고 있어
서로 대비(對比)가 되는 가편(佳篇)들이다.
시인은 작품 속에서 인생이니, 삶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전혀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초설을 맞고 있는 나목에 관한 이야기만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독자로 하여금 인생을, 삶의 길을 생각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첫 수를 본다.
한 그루의 나무가 무수히 갖고 있던,
자신이 살기 위하여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잎들.
그 잎들처럼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것,
마지막 하나 남을 때까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뭐 속되고도 쉽게 생각하면 부귀공명(富貴功名) 이런 거 아니겠는가.
그것들을 마지막 하나까지 버리고 나니
지금까지 내가 달려오는 길에 걸림돌로 여겨지던,
적으로만 보이던 /바람도 무섭지 않/고, 오히려 그 바람까지 /내 편/이 될 수 있는, 차원 높은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둘째 수이다. /먹이와 배설에 묶여 쉼 없이 달려온 몸/,
살기 위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오는 가운데 상처 난 몸 -/
벌레집 습한 상처들/-을 /눈바람 흠뻑 쐼/으로써, /
뽀송뽀송/하게 치료하고자 하고 있다.
끝으로 셋째 수에서는 위의 두 수를 잘 받고 있다.
내리던 초설도 그치고 자부룩히 눈 쌓인 벌판이 아름답다.
거기에다 나목은 흰눈을 맞고 -/빛 너울 살짝 걸치고/ -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 나무는 이미 첫 수를 시작하기 전의 나무가 아니다.
북풍과 초설을 맞고 모든 것을 초탈한, /한 가닥 부끄럼 없이/
태초의 한 점 순수/를 간직한 나무, 변화된 생각을 가진 나무,
변화된 모습의 나무이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초설을 맞으며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보고,
깊은 사색을 통하여 초설을 맞기 전의 나무와 그 뒤의 나무를 인간살이에 견주어
이렇게 깔끔하게 써낼 수 있는 이옥진 시인의 詩力에 박수를 보낸다.
- 나래시조 2007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