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청소기/정다혜

 

 

진공청소기

정다혜



슬픔을 보면 식욕이 솟구쳐요
왕성한 식욕으로 당신을 송두리째
단숨에 먹어치워 버리고 싶어요
장롱 아래 깊숙한 곳에 뿌려진 눈물
책상다리 뒤편에 숨겨진 아픔
장판 밑에 꼭꼭 숨겨놓은 그리움
베란다 구석에 서식하는 벌레까지
내가 먹어드릴게요
그건 내게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어서
슬픔을 빨아들인 내 속에
검은 담석이 별처럼 박혀 있어요
나의 만성위염은 사랑하기 때문
만성위염이 불치의 병을 만든다 해도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쉬지 않고 당신의 전부를 먹어치우는 일
사랑의 코드가 220볼트에 연결되어 있는 이상
쉬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는 이 식탐
이 넘치는 사랑의 두툼한 입술에
입맞춰 주세요


―《서시》2008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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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혜 / 1955년 대전 출생. 경희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 길 위에 네가 있었다』『스피노자의 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