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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강 / 박시교

햇살 한 줌 2008. 2. 3. 22:46

겨울강

 

 

 

                                               박 시 교

 

오늘 이 아픔들을 말로 다 못할 것이라면

무심히 그냥 그렇게 겨울강을 가 보아라

은밀히 숨죽여 우는 겨울강을 가 보아라

 

짙푸르던 강줄기는 얼붙어 멈추었고

산도 굴릴 것 같던 그 몸부림도 멎었어라

누군가 이 뜻 알겠노라면 죽어서 묵도하라

 

귀기울이면 선한 소리, 내심(內心)의 너 겨울강아

근심의 잔뿌리랑 잔기침의 매듭꺼정

이대로 잠보다 긴 꿈, 꿈에 갇힌 겨울강아

 

이제 우리네는 밤중에도 눈을 뜨고

가슴 속은 임의로 문신한 햇덩이가 탄다지만

가진 것 다 뿌려 준 후에 가득차는 이 절망아

 

한숨의 이 씨날에 날줄은 무얼 넣나

없는 것은 다 좋고 하나쯤 있었으면 싶은

뜨거운 숨의 뜨거운을 빙판 눕힌 겨울강아

 

보겠는가, 눈뜨고 눈감고 보겠는가

무심히 그냥 그렇게 겨울강을 보겠는가

상류로, 상류로부터 걱정만 쌓는 겨울강아

 

 

시조 감상)

김소월의 "왕십리"나 "진달래"가 우리 민족의 전통적 서정시인 情恨인 이별이나 슬픔을 노래한 시라면

이 시조는 그것들보다 한층 깊은 원초적인 슬픔과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오늘 이 아픔들을 말로 다 못할 것이라면"

얼마나 가슴 찢는 아픔이 있기에 말로 해도, 해도 다 못할 정도의 아픔이 있었기에

시적 화자는 "무심히 그냥 그렇게 겨울강에" 가 보라고 합니까.

 

그 겨울강은

"짙푸르던 강줄기는 얼붙어 멈추었"으며

"산도 굴릴 것 같던 그 몸부림도 멎"은

지독한 아픔을 차디 찬 얼음으로 꽁꽁 묶어놓은 상태랍니다.

 

또, 그 근원적인 아픔을 아는 사람은

"죽어서 묵도"하랍니다.

살아서는 결코 풀을 수 없는 이렇게 지난한 것을 가슴에 간직한 시적 화자의 그 아픔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근심의 잔뿌리랑 잔기침의 매듭까지" 모두 잠보다 긴 꿈에 가둔 그 얼음덩어리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처럼 겨울강에 옴짝달삭할 수 없이 갇혀버린

내면의 아픔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용솟음치듯 폭발시키는

저 시인의 놀라운 폭발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힘이며,

아픔을 노래하면서 웅장한 필치로

이렇게 가슴을 소용돌이치게 하는 힘이야말로

이 시조가 갖는 지대한 마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겨울강처럼 얼붙은 저 아픔은

"가슴 속은 임의로 문신한 햇덩이가 타"듯해서

"가득차는 절망"까지 이 "한숨의 씨날에"

무얼 넣어야 하는가"라며 자신에게 되묻고 있으며

 

그리고

"보겠는가, 눈뜨고 눈감고 보겠는가"라며 절규합니다.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그 겨울강은

사실은 모든 것을 품어 안고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내면의 소리에 직시하라는

저 추상같은 외침을...

 

얼음 속의 뜨거운 숨을 품고 있는

겨울강을 보라는 것은

아픔을 그냥 아픔으로 보지말고

아픔의 그 내면을 넘어서서 승화하는 초월의 힘을

느껴보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긴 호흡의 이 시조에서

단군으로부터 면면히 그 혈맥을 타고

뜨겁게 용틀림하는

그런 천둥소리를 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