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이 밥을 차린다
/김승희
식탁이 밥을 차린다
밥이 나를 먹는다
칫솔이 나를 양치질한다
거울이 나를 잡는다 그 순간 나는 극장이 되고
세미나 룸이 되고
흡혈귀의 키스가 되고
극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가지 일들이
거울이 된다
켈빈 클라인이 나를 입고
나나리치가 나를 뿌린다
CNN이 나를 시청한다
타임즈가 나를 구독한다
신발이 나를 신는다
길이 나를 걸어간다
신용카드가 나를 소비하고
신용카드가 나를 분실신고한다
시계가 나를 몰아간다 저속 기어로 혹은 고속 기어로
내 몸은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한다
비타민 외판원을 나는 거절한다
낮에는 진통제를 먹고
밤에는 수면제를 먹으면 된다
부두에 서 있고 싶다
다시 부두에……
시티은행 지점장이 한강변에서 음독자살을 하고
시력이 나쁜 나는 그 기사를 읽기 위해
신문지를 얼굴 가까이 댄다
신문지가 얼굴을 와락 잡아당겨
내 피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 신문이 된다
몸에서 활자가 벗겨지지 않는다
―《창작과비평》1999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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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 / 1952년 광주 출생.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시집 『태양 미사』『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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