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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치다/ 이경교

햇살 한 줌 2009. 2. 18. 22:25

벼락치다 (외 2편)
          /이경교


처음, 빗줄기에 기대어 네게로 갈 때

네 몸의 푸른 정맥들, 투명한 실핏줄을 비추고 싶었지

네 옷자락이 방전을 일으킨 걸까,

 아니야 내 가슴이 성급하게 더워졌어,

아직 나는 저문 바다 위 빗방울이거나

새벽 창가로 번지는 모과향이고 싶어,

 

나를 지나가는 전류의 틈새를 감미로운 잠으로 머물게 하고 내 몸의 불을 끄고 싶어

네게 닿는 순간,

내 안쪽의 발열이 불어나,

팽창하고, 터지는 걸 우울하게 지켜보았지,

세계의 지붕이 한꺼번에 번쩍인 것도 내 눈이 멀었기 때문이야

네게 기대어 사라지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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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모감주나무





나는 휩쓸렸다 바다에 속해 있었다, 종종 뒤틀리고 넘쳤다 안개 줄기가 희미하게 비추는 그곳, 내 오래된 무덤들, 나는 하염없이 흘렀다 나는 섞여버렸으며 언덕과 강물 사이처럼 깊어졌다

땅이 나에게 마음을 허락한 후, 나는 길이 되었다 저 길은 얼마나 많은 새 울음을 기억하고 있을까 내 몸의 옹이들이 꼭꼭 쟁여 둔 그 소리, 나는 벗어날 수 없는 바다의 영역이었다

그을린 램프빛 속으로 나는 구부러졌다 우울한 마디 사이로 빛과 그늘이 불어났으며 내 속에서 새로운 무덤들이 자랐다 강물을 통과하는 배처럼 나는 미끄러졌다, 헤아릴 수 없이 넓어지면서


―《현대시》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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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띠





변덕 심한 가슴 속으로 한 줄기 햇살
명징한 선으로 꽂힌다
거침없이 들어온 햇살에도
아픔을 느끼는 건 웬일일까
칼바람 맞으며 아파 울던
나무들도 꽃을 피워내는
이 아침
언제나 앉아 있는 자리는
아침이기도 하다가 저녁이기도 하다가
여름이기도 하다가 겨울이기도 하다가
쉴 새 없이 경계를 모르는 채
돌고 도는 어지러움
먼지를 일으킨다
변하는 것은 일상의 식욕과 홀로
갇혀 있을 때조차도 들끓고 있는
생각뿐
세상살이 모두가 뒤범벅이 된
가슴에 걸려 흔들리는
뫼비우스의 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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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교 / 1958년 충남 서산 출생.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시집 『꽃이 피는 이유』 『달의 뼈』 등.

시 해설서 『한국 현대시 이해와 감상』.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