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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詩篇 / 박기섭

햇살 한 줌 2010. 11. 7. 22:25

구절초 詩篇

 

               박기섭

 

찻물을 올려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 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 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 하나 지어 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 잔을 올립니다

- 박기섭의 "구절초 詩篇"


문학평론가 박영호는 박기섭의 "구절초 詩篇"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구절초 詩篇]에서 우리는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이제는 저 깊은 심연의 세계로 침몰시키려는 체념을 읽을 수 있다.

어느덧 계절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가을로 바뀌었다.

 세월이 흐르면 그리움도 그렇게 퇴락할 줄 알았는데 억지로 숨겨두었던 그리움이 의식의 수면 위로 샘처럼 솟구친다.

그리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가슴은 온통 젖어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제는 허상(虛像) 같은 그대에게 그저 차 한 잔 올리는 일일뿐이다.


시인에게 있어 그리움이란 "두어 평 꽃밭마저 가꾸지 못하게 하고"

"때로는 다 못간 적멸의 길("和順 赤壁") 먼발치에서 떠돌게 하는 끝을 알 수 없는 깊고 깊은 수심일 뿐이다.

그리운 대상과 결코 화합할 수 없는 슬픔을 그린 작품이 어찌 위의 작품뿐이겠는가.

 그럼에도 위의 작품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을 하늘같은 청량함과 정갈함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부질없는 욕망을 덜어내려는

그리고 그리움의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지려는

그래서 그리움조차도 멀리서 맑은 시선으로 응시하려는 시인의 자세 때문이다.


위의 작품이 연시(戀詩)는 평범함을 뛰어넘기 쉽지 않다는 통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움이란 정서를 구절초라는 대상이 지닌 이미지로 환치시키는 과정에서

한순간도 잃지 않고 있는 긴장감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즉 긴장감을 잃지 않는 언어가 곧 살아있는 시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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